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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심각한 식량 위기가 발생하자 동포애로 쌀 15만 톤을 전달하던 김영삼 정부 시절의 작은 가족사 이야기입니다. 남북 관계가 경직된 것은 노태우 정부 시절에 남북 교류 협력에 관한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남북 긴장이 다소 완화 될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은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졌으며, 장기려의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하여 북한 가족 상봉을 위한 기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부산에 있는 은사에게 미국의 제자들은 준비된 평양 방문 계획을 전달했습니다.
놀랍게도, 장기려의 반응은 보통 사람들이 확신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1천만 명의 이산가족들이 모두 고통스러워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가족 상봉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요?”교사의 예기치 못한 반응에 대해 열심히 일하고 준비한 제자들은 놀랐고, 서운했지만, 은혜의 성격과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고뇌한 후 교사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장기려 씨는 생전에 고향을 방문하여 가족 상봉을 하지 못했습니다. 숨진 지 5년이 지난 2000년 8월 아들 장가용 교수가 이산가족 자원봉사 의료요원 자격으로 고향을 방문하게 됐습니다.